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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대종사 사상

근대의 선지식 '백용성'의 생애와 사상

  백용성(1864~1940)은 조선시대의 암흑과 같은 산중불교에서 새로운 세상의 불교로 가기 위해 가시밭길을 헤쳐 나간 시대의 보살이었다. 불교의 중흥과 발전을 기하기 위해 가열찬 행보를 한 백용성은 한편으로는 한국을 침략, 식민통치를 한 일제뿐만 아니라 그에 협조한 일본불교와의 처절한 대결을 전개하였다. 또한 당시는 외세를 등에 업은 기독교, 천주교가 교세를 강화하던 시기였기에 백용성의 활동은 백척간두와 같은 지경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이에 당시 불교도들도 불교 혁신을 기하며 그에 대응하려는 의식을 갖고 실현 노력을 적지 않게 기울였다. 그런데 위와 같은 현실에 영향을 미친 요소는 일본불교였다. 도성출입 금지령의 해제 이후 증가하였던 일본불교는 이제의 외호 아래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부 청년 승려들은 일본불교를 우월한 문명으로 보고 한국불교가 모방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이렇게 일본불교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급기야는 한국불교의 전통이 파탄되는 지경에 처하였는데, 글 실례가 이른바 대처식육이다.
  따라서 백용성은 이 같은 현실을 냉철히 직시하면서 불교 발전을 위한 과제에 직면하였다. 자연히 그 방향은 우리 불교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일본불교의 도전을 극복하고, 나아가서는 민족운동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이는 곧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근대불교계에서 이 같은 길을 걸어간 불교도는 적지 않았지만, 그 대상 승려로 가장 먼저 지목해야 할 인물은 백용성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수행과 깨달음

  백용성은 1864년 음력 5월 8일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다, 14세 때 남원 교룡산성의 덕밀암으로 제1차 출가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로 인해 실패하고, 다시 16세 때 해인사 극락암으로 제2차 출가를 하여 정식으로 승려의 길을 내딛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승려의 기본 수양을 익힌 다음, 고운사의 수월 영민선사에게 나아가 지도를 받았다. 당시 그 지도의 요체는 대비주를 통한 업장의 소멸이었다. 마침내 그는 19세 무렵 파주 보광사의 도솔암에서 정진 중 1차 깨달음을 얻었다. 그 이후 그 깨달음을 점검받기 위해 금강산 표훈사의 무융선사를 찾아갔는데, 무융은 백용성에게 무자화두를 통한 수행을 권유하였다. 이에 백용성은 수행을 거듭하여 보광사에서 제2차 깨달음을 얻었다. 그 직후 그는 통도사로 가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그리고 송광사에서 『전등록』을 열람할 때 또 한번 깨달음의 진수를 경험하였다.
  백용성을 이같은 깨달음 이후에는 각처의 강백과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수행을 더욱 치열하게 하였다. 그 결과 그의 나이 23세 때에 4차 깨달음이라 일컬어지는 노래를 낙동강을 건너는 뱃전에서 읊었으니, 이는 그의 보리도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노래는 후일 그가 대각교운동을 추진할 때 대각교의 종지를 보여주는 바로 그 오도송(悟道頌)이었다.

“금오선에는 천추의 밝은 달이요,
낙동에는 만 리의 물결이로다.
고기잡이 배는 어디로 갔는고,
예처럼 갈대꽃에서 잠을 자도다.”

  이와 같은 백용성의 깨침은 깨침으로 법칙을 삼아 향상일로를 밝힌 것으로, 차제적 얻음을 보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정법안장을 훗날의 제자와 중생에게 부척하면서 조사의 본분 종지를 전한 것이다.
  이후 백용성은 은둔과 보림으로 나아갔다. 때로는 일체의 곳에 행적을 남지지 않았고, 신지식을 찾아가 깨달음을 확인하였다. 선‧교‧율의 서적과 어록을 배우고, 선사‧강백‧율사 등의 대종장과 법거량도 하였으니 그 기간은 대략 17년이었다. 그 기간 동안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의 명성이 각처에 떨치게 된 시기였다. 달리 말하면 철저한 수행이었으며, 상구보리의 시기였다.

보살행, 중생과 민족에게

  백용성이 치열한 수행을 통하여 얻은 깨달음을 중생과 민족에게 회향하기 위해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온 시점은 그의 나이 40세이던 1903년이었다. 우선 그는 자신이 깨달은 바를 수행중인 승려들에게 제공하였다.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지리산 상비로암, 보개산 성주암, 망월사, 백련암, 호국사 등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선회를 개창하고 『산문요지』를 저술하였으며, 학인들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1907년 중국에 가서 한국불교의 자존심을 드높였다.
  중국에서 귀국한 백용성은 해인사에서 미타회를 개설하고, 지리산 칠불암의 종주로 활동하였다. 칠불암에서는 그 유명한 『귀원정종』을 집필하여 여타 종교와 비교했을 때 불교가 우수함을 강조하였다. 이는 당시 여타 종교로부터의 비판이 거셌던 실상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소치였다.
  이처럼 백용성은 깨달음, 수행과 점검, 회향 등을 거듭하면서 점차 민족불교의 무대로 나설 채비를 하였다. 그런데 당시는 풍전등화와 같은 지경에서 국운이 쇠하고 국권이 상실되는 현실로 변하고 있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백용성은 산속에만 머무를 수 없어, 마침내 그 현실의 중심인 서울로 나왔으니, 그때가 1911년 2월이었다.
  그가 서울에 왔을 당시는 기독교의 왕성한 포교가 득세하고 불교계는 서울에 각황사(현 조계사)만 존재하던 시기였다. 이에 그는 신도 집에 거처를 마련하고 선 포교의 대중화에 나섰다. 그런데 그즈음 불교계에 논란이 되고 있었던 것은 조동종맹약과 그 반발로 인한 임제종운동이었다. 임제종운동은 한국불교 수호운동으로서 민족불교를 지향하고 있었다. 한용운, 박한영 등이 주도한 그 운동은 마침내 1912년 초에 서울로 진출하여, 조신임제종중앙포교당을 지금의 인사동에 건립하게 되었다. 백용성은 그 포교당의 개교사장으로서 활약하였다. 즉 백용성이 민족불교의 중심부에 진입한 것이다.
  한편, 당시는 일제가 사찰령으로 불교계를 강압하던 시절이었다. 일제는 한국불교에 ‘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는 몰역사적인 종명을 강요하였다. 이에 백용성은 한국불교의 종지와 종통은 임제종에 있음을 필설로써 강요하였다. 그의 행동은 일제가 ‘임제종’을 사용하지 못하게 강요하는 정책으로 인해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2년 6월, 그 포교당 간판은 내려지고 대신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명칭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백용성은 선명한 포교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포교당과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조신임제파강구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개인적인 그 활동은 운영자금이라는 암초에 부딪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그는 그 타개를 위해 북청으로 가서 3년간 금광을 경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금광사업이 여의치 않았기에 서울로 다시 돌아와 1916년에 마련한 봉익동 1번지의 포교당을 거점으로 포교활동을 고심하였다. 바로 그즈음 3.1운동이 서서히 준비되었다. 불교계에서는 백용성과 함께 임제종운동을 주도하였던 한용운이 그 일선에 있었다. 백용성은 한용운을 매개로 3.1운동의 중심부인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하였다. 그가 3.1운동에 동참한 것은 불교사상의 측면에서, 조선의 독립은 마땅한 일이라는 그의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불교의 대중화와 혁신, 대각교 운동

  백용성은 3.1운동으로 인해 일제에 피체, 수감되었다. 그러나 백용성은 감옥에서도 불교의 대중화와 혁신을 위한 고뇌를 거듭하였다. 그 결과 그는 출옥하자마자 감옥에서 결심한 불교 대중화를 위한 첫걸음인 역경사업에 뛰어들었다. ‘삼장역회’를 조직, 『금강경』을 번역하고 『심조만유론』 등을 저술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더구나 백용성의 이러한 활동은 당시 불교계의 도움이 전혀 없는 상태, 아니 오히려 그를 비방하는 현실에서 나왔다.
  한편, 그 무렵 그는 선학원의 발기인으로 활동하였고, 그의 사상을 구현하는 거점인 서울 봉익동 2번지에 ‘대각교당’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리고 본질적인 한국불교의 전통을 올곧게 가져가려는 야심찬 사업을 추진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망월사에서 조직한 ‘만일참선결사회’였다. 이 결사회는 계율 파괴와 선의 몰락을 우려하는 심정에서 비롯되었으며, 한국불교의 전통 회복을 통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청정 수좌인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결사회는 그 후 천성산 통도사 내원암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당시 백용성은 크게 고뇌하였으니, 그의 충심을 이해하지 못한 나약한 수좌들의 수행 태도 때문이었다. 당시 백용성은 율행과 보살행이 없는 선을 가혹하게 비판했다. 백용성은 선과 율을 아울러 행하고, 계정혜 삼학을 뚜렷이 닦는 선풍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당시 세태는 백용성의 선풍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리고 백용성은 자신이 통도사 선곡율사로부터 받은 조선 후기 서상수계의 정신을 계승, 구현하기 위해 금강계단을 세웠다. 이는 『범망경』의 보살계 정신과 출가 승단의 『사분율』 정신을 회통한 것으로 선율겸행을 부정하던 풍토에 강력 대응한 것이다.
  백용성의 고뇌는 1926년 승려의 대처식육 금지를 총독부에 요구한 건백서로 이어졌다. 대처식육을 불교 발전의 암초로 여긴 그는 그 해결을 위한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 노력은 계율 파괴를 방관한 승려들의 무관심과 일제의 탄압으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에 그는 기존 불교계에 대한 환멸을 갖고 기존 승적을 내던지고 자신만의 독자성을 높이 쳐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대각교의 선언이었다. 계율 파괴, 일제와의 타협, 불교재산의 망실, 불교정신의 부재 등은 그를 기존 불교계와 같이 갈 수 없게 하였다. 백용성은 그의 사상을 역사에 회향하였거니와, 더 큰 무대로 그의 정신을 던졌다. 이런 배경에서 그는 1927년 ‘대각교중앙본부’ 현판을 걸고, 대각교 지부 조직을 가동시켰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고투, 노선에 대해 일제는 신종교라는 명분으로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36년경에는 일시적으로 대각교를 해체하고 범어사와 은행에 재산을 위탁했다. 그렇지만 일제의 탄압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조선불교 선종 총림’이라는 이름으로 재기하였다. 이를 위해 저항불교의 거점인 선학원과 우호노선을 검토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불교의 대중화 및 혁신을 기하기 위한 고독한 길을 걸었다. 그는 대각교를 활성화시키면서 선율겸행, 선농일치라는 대안을실행하고자 하였다. 민주 용정 대각교당을 기설하면서 추진한 선농당, 그리고 함양 화과원의 개설은 그 예증이었다. 용정과 함양의 농장에서 나온 잉여 재원은 상해 임시정부로 흘러갔다는 구전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해방되던 해인 1945년 12월 12일, 김구를 비롯한 임정의 요인 10여 명이 백용성의 혼이 배어 있는 사찰인 대각사를 찾았음도 간과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는 『화엄경』, 『범망경』 등을 우리말로 번역‧간행하는 등 역경불사를 통한 불교 대중화 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어린이 포교, 찬불가 작사, 부인선원의 운영 등 지금도 단행하기 어려운 행보를 약 90년 전에 이미 실행에 옮겼다.그러면서도 『각해일륜』, 『청공원일』, 『수심론』, 『임종결』, 『대각교 의식』 등 다양한 사상서를 저술, 발간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저술에 나타난 그의 불교사상은 참선, 염불, 간경, 주력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요컨대 그의 불교사상은 폭이 넓고 원융적이었다. 이렇게 그는 저술, 역경(譯經), 불교개혁, 선농불교(禪農佛敎), 포교 등 다방면에서 근대불교의 새로운 노선을 개척하였다. 이 같은 그의 노선은 전통과 근대를 원융적으로 조화시키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런 행보에 나타난 고독, 생경, 두려움 등을 되새겨 보면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위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그는 근대불교를 대표할 수 있는 눈 밝은 불교의 지성인으로서 외롭게 무소의 뿔처럼 자신의 길을 혼자서 갔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입적한 1940년 그날까지 대승불교의 지향인 ‘상구보리 하화중생’ 구현과 함께 민족불교의 지향을 위해 올곧게 그의 길을 걸은 것이다.

- 김광식 著, 『백용성 연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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